Artist, Soungsoo Lee 이성수
신의 모습
신의 모습은 추상입니다.
이름 붙일 수 없는 형태.
그래서 신의 모습은 늘 어떤 비유로만
묘사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자꾸 신을 비유로 부르다 보면
어느 순간 신을 부를 때 사용되는 단어 중 빈도수가
많은 단어를 진짜 그의 이름인양 사용하게 됩니다.
하지만 신은 추상, 어떤 이름도 그를 포함해선 안됩니다.
신의 이름이 결정될 무렵, 그 이름에 대한 모욕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비유로 신은 확장되어야 합니다.
신은 언어 안에서 아무리 확장되어도 어색함이 없습니다.
worship 100F oil on canvas 2007
신의 모습
신의 모습은 추상입니다.
이름 붙일 수 없는 형태.
그래서 신의 모습은 늘 어떤 비유로만
묘사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자꾸 신을 비유로 부르다 보면
어느 순간 신을 부를 때 사용되는 단어 중 빈도수가
많은 단어를 진짜 그의 이름인양 사용하게 됩니다.
하지만 신은 추상, 어떤 이름도 그를 포함해선 안됩니다.
신의 이름이 결정될 무렵, 그 이름에 대한 모욕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비유로 신은 확장되어야 합니다.
신은 언어 안에서 아무리 확장되어도 어색함이 없습니다.
worship 100F oil on canvas 2007
war of flowers 100*100cm oil on canvas 2007
꽃짐
꽃을 그려야 한다.
내게 꽃의 의미는 늘 무겁다.
그 화려함이 내 팔과 어깨를 짓눌러
이제 나는 이 계절이 지나기만 기다린다.
내가 알던 이 계절은 허영스러웠다.
허영스러운 나는
한 송이, 한 송이, 한 송이
그렇게 내 욕구를 쌓아왔다.
이제 털어버릴 이 아름다움이
안타깝지 않을 것은
열매의 계절이 다가오기 때문이라.
다시 찾아올 반복된 허영과 욕구.
난 이 꽃의 계절이 지나가길 무겁게 기다린다.
가축의 왕
이제 난 늙었고
내 사랑하는 가축들만이
내 곁에 남았다.
난 한번도 그들을 지배하지 않았고
다만 그들을 먹이고 보호했으며
그들을 먹어왔다.
이제 내가 죽으면 이들이 나를
먹고 방치하고 사랑하리라.
왕으로서 이보다 완벽한 삶,
이렇게 완전한 죽음이 또 있을까?
어떤 종교의 어떤 교리처럼
난 내가 사랑하는 이들과
기쁨을 함께 하고 고통을 나누며
삶의 시간과 죽음 이후와
역사와 소문을 함께 하고
그들의 이름과 섞여 불리움으로
그들과 다시 태어나고
그들도 나로 태어나리라.
애견의 죽음 60F oil on canvas 2009
Dance, Dance
진동은 공간을 만나 파장이 되고
파장은 막다른 곳에서 리듬을 만들며
리듬은 슬픔을 만나 춤이 된다.
누구도 춤추는 그들에게 춤을 추도록 명령하지 않는다.
다만 춤을 추지 않고 있던 춤꾼들에게 동기(motive)는
비교적 작거나 혹은 무거운
고통을 관통하였을 뿐이다.
고통을 동반하지 않은 어떠한 춤사위도
필연적인, 운명의, 철학적이며, 간절한
실천이 아니라는 생각뿐이다.
그리하여 진정한 춤꾼은 슬픔이 찾아오는 그 때까지
어떠한 움직임도 조심스러워하며 느리게 걷거나 움직이지도 않을 것이다.
동기가 건네는 순수한 슬픔이 찾아올 그 순간까지...
Latin wedding 100F oil on canvas 2006
기적
진지한 고민이 늘 진지한 현실과 만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 진실은 전혀 꼬이지 않은 명료함 속에 생각을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행복에 관하여 말하자면 단순함은 더욱더 의미 있는
진실입니다. 구토나 배설, 착시와 현기증, 배고픔과 고통 등의
몸의 논리가 그렇고, 무거움과 가벼움, 마찰과 문드러짐 등의
물리적 현상이 그렇듯 단순한 진실들입니다.
오늘 난 갈등과 혼란의 모호함 속에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늘엔 거대한 달이 빛나고, 낯선 수풀은 바람에 흔들리며,
새와 벌레가 소리를 내어 무슨 유치한 performance를
협연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단순하고 유치한 공연은 정말 처음 봅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내가 이 유치한 공연의 주인공입니다.
난 큰 소리로 기도하였고, 나의 모든 소원은 이루어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경험하는 나의 삶은 참
단순하며 지루하며 갑작스럽고 유치합니다.
game control 100F oil on canvas 2009
Trend report
지금은 동물의 시대.
식물도 동물이 되려 하고
인간도 동물에서 자신의 정체를 발견하며
신도 동물을 통해 나타난다.
동물은 자기 필연성을 가진 존재인 동시에
스스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동물은 제 아무리 느린 경우에도
정지하지 않는다.
너무 많이 생각하지도 않고
상황을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자기 이름의 영광을 지켜가는 그들은
식물이나 인간에겐 경외의
대상이 되었으며,
신에겐 가장 자랑스러운
피조물로 사랑을 받는다.
신은 그래서 요즈음 특히
동물에게 영혼을 주지 않는다.
king of birds 100*100cm oil on canvas 2009
까마귀
삐그덕 거리는 내 몸엔
남들에겐 없는 뼈가 하나 더 있다.
이 작은 한 덩어리의 변칙적인 구조가
내 인생엔 치명적인 factor가 되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일들의
경계를 나누고 마치 내가 한 덩어리 기계인양
조종하는 주체가 되었다.
그것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저항은 오로지 작은 소음,
거친 마디의 마찰로 세상에 소리질러
내 안에 무엇인가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알리는 것 뿐이다.
내 몸의 조정자, 이 작은 덩어리의 칼슘은
나로 춤을 추지 못하게 하며, 나로 잠들지 못하게 하고,
뛰지 못하게 하며, 숙여 절하지 못하게 하여,
나로 좀체 날지 못하게 한다.
crows 20F oil on canvas 2009
Falling Bulls
앗! 떨어진다.
난 밭을 갈고 있었다.
난 투우를 하고 있었다.
난 예배 의식중이었다.
그러나 이제 난 올라가고
또 난 내려간다.
이것은 태풍이다.
혁명이다. 반역이다.
의미를 쪼개고 계급을 평하게 할
이 추락은 소낙비이다.
결론은 구태하다.
결국 찌그러질 이 상징들은 살아있는
기적이다.
falling bulls 40F oil on canvas 2000
Vegetarian
한 친구와 식사를 하였다.
식사는 죽은 지 한 달여 되는
돼지와 소의 살점을 구워먹는
축제의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동물의 붉은 피부는 붉은 불 속에서
하얗게, 다시 갈색으로 바뀌어가다
검정색이 되었다.
난 살점을 굽고 있는
내 친구의 붉은 눈을 한참 바라보고는
살 한 점도 입으로 넣지 못했다.
다음 날부터 난 동물을 먹지 않았다.
그리곤 세상을 더 사랑하게 되었다.
Fruiterian
젠장할 채식주의자 놈들.
내가 그 자식들보다 더 윤리적인 광대가
되는 길은 의도하지 않은 죽음을 맞은
시체만 먹는 거다.
여러 주검을 맛보았으나
몇 번의 식중독을 경험한 후
이제 난 과일만 먹기로 한다.
vegetirian 40F oil on canvas 2000
비와 재즈
비는 내 마음에 Jazz를 부른다.
거친 바람, 빠른 박의 두드림과
Base. 촉촉한 Base와 습함.
여기에 가끔 경쾌한 파열음이 더해진다.
경쾌한 소리는 집 밖이 아닌 마음에 있다.
마음의 외로움. 중한 비 속의 경쾌한 외로움...
Jazz는 Irony이다.
외부와 내부의 사이에,
연주와 같은 흐름과 에드립의 사이에,
외로움과 Melancholy의 사이에,
많은 Irony의 사이에
Jazz가 있다.
이 시점에 비가 부르는 것은 고요함.
어울림을 위해, 내 마음은 필요한 흥분을 공급하리라.
비는 내게 늘 비로서 완벽하지 않다.
그 결핍은 내 마음의 경쾌함을 부르며
이 모순된 어울림이 비오는 날을
Jazz가 되게 한다.
큰 비가 내렸으면 좋겠다.
rain_summer 60F oil on canvas 2000